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
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
라며 시 앞에 섰다.
나쁜 소년이 서있다 / 허 연 / 민음사
# 여름이 간다.
방학도 끝났다.
또 다시 인간이 가는 뻔한 길을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