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구름의 그림자가 화인처럼 찍힌 저녁 바다를 바라본다
나의 파탄이 누군가의 파탄으로 파도쳐 간다
어떻게 그댈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사소한 기억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그대를
수 개의 등불을 끄고 한 권의 책을 덮으면
이 방의 어둠은 완성된다
행간에 머물던 내 시선이 곁눈질로 더듬었던 달빛이
방 안에 순식간에 스며든다
나는 나를 간절히 안아주고 싶기도 하고
이 세계를 두 발자국 만에 짓눌러버릴
거대한 눈사람을 저 모래사장에 우뚝 세우고 싶기도 하다
간혹 내 머릿속에선
옷을 입고 있는 사람과 벗고 있는 사람이
나를 버린 이들의 목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간간이 동시에 떠오르는 다른 죽음들
회환과 자조로 가득한 겨울밤
과거를 향하여 이를 가는 짐승
파도를 가지 치며 수평선 위로
쑥쑥 자라 오르는 미래의 날카로운 환상
그때 뜨거운 물을 숨긴 주전자 같은 영혼은
내가 셋을 세기도 전에 태어나는 것이다
완벽한 혼란이 아니라 혼란스런 완벽으로부터
여관방 구석의 냉장고에서
실금 같은 빛이 새어나와 세계를 야금야금 톱질하기 시작한다
결국 극단을 택할 것인가, 나는
(눈앞에 없는 사람 / 심보선 / 문학과 지성사 / 2011)
# '홀로 여관방' 하면 나도 일가견이 있다.
마음과 몸이 모두 방황하던 스무살 초입, 나는 '과거를 향해 이를 가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아무리 떨치려해도 떨쳐지지 않던 과거의 그림자들...
내 영혼을 서서히 잠식하던 그 그림자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나는 거칠게 방황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떼어낼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아침 무심히 펼친 페이지의 시 한편이 나를 아프게 방황하던 시절로 잠시 데려다 주었다.
이제 다신 홀로 여관방에 머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극단을 택'하지 않겠다고, 기어코 살아 남아서 질긴 생을 이어가겠노라고
오래전에... 오래전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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