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고향
고향
나는 북관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한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백석 [정본 백석 시집 문학동네]
느닷없이 따순 날씨가 사나흘 지속되며 여름날 폭우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진눈깨비 섞인 칼바람이 기온을 뚝 떨어트렸다.
바깥의 일기가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은 누추하나마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몸이 아프다는 것은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시인이 자진해서 의원을 찾을 정도면 어지간히 몸이 아프긴 했나보다.
우연히 찾아든 의원이 시인이 아버지로 섬기는 고향 사람과 막역지간이라하시니,
그의 맥짚은 손길조차 따스히 여겨지고,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시인의 옆에 와 있는 듯하다니, 고향이 어지간히 그리웠나보다.
백석의 시는 오늘처럼 찬바람 쌩쌩부는 겨울밤에 읽으면 제 맛이다.
어린시절 부모님 무릎에 앉아 듣던 여우이야기나, 설에 친척들이 모여
음식을 해먹는 이야기, 무심히 벽에 기대어 드는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 하듯
시로 써내려간다.
그것들을 노랗고 흐린 불빛 아래에서 느릿느릿 읽다보면, 백석도 그의 고향도
내 곁에 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