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상추쌈이나 한 상 / 성미정

리프그린 2011. 12. 30. 12:42

 

 

 

상추쌈이나 한 상

 

눈물 마른 날에는 상추쌈이나 한 상

먹어야겠다 시들부들 말라가다가도

물에 담그기만 하면 징그럽게

다시 살아나는 상추에 밥을 싸서

한입 가득 먹으며 지금

눈에서 나오는 물은 상추 때문이라

말하며 목이 메게 상추쌈이나

먹어야겠다 세월이 약이란 새빨간

거짓말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에

된장을 척 발라 꾸역꾸역 삼켜봐야겠다

주먹으로 가슴패기를 팍팍 쳐가며

섬겨봐야겠다 상추를 자를 때 나오는

하얗고 끈끈한 진액이 불면증엔

특효약이라니 상추쌈이나 한 상

가득 먹고 뿌리까지 시들게 하는

오래된 상처일랑은 그만 이겨버리고

뉘엿뉘엿 날이 저물 때까지

낮잠이나 자는 척해야겠다.

(성미정 /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 문학동네 / 2011)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있다.

그런 질긴 상처들은 가끔 방심한 마음의 틈을 벌리고 나와

눈물을 쏟게 만든다.

시인은 '세월이 약이란 새빨간 거짓말'이란 생의 비밀을 일찌감치 간파했나보다.

달리 약이 없으니 꾸역꾸역 목이 메게 상추쌈을 먹는 것으로

상처와 눈물을 감추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오늘 열 하루 휴가의 첫 날이다.

여름방학과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빈곤한 살림에 묶여 방콕을 일삼겠지만,

이마저도 없이 추운겨울 바깥에서 생을 위해 애쓰는 이들에 비하면

엄청난 행운이라 여기며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