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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나는 늙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린 정빈이의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리고...

그냥 가기 허전해서 2층 성인 도서 자료실을 들렀다.

읽을 만한 책도 없고

딱히 뭔가를 읽을 맘도 없어서

성의없이 서가를 서성이다가 뽑아든 시집 한 권

무심코 펼쳤다가

감전이라도 된 듯

첫 문장에서 몸이 얼어 버렸다.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 보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저 괴물 같은 아름다운 달

뒤로 부옇게 흐린 빛은 오로라인가

이 궁벽한 모텔에서 아직 다하지 않은 참회의

말 생각하며 한밤을 깨어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어디론가 사라질

삶, 징그러운 얼굴들 뿌리치려 밤새

몸 흔드는 나뭇잎들, 아주 흐리게 보이는

소리 사이로 눈발 같은 미련 섞여 있어

눈물겹다 세상의 길이란 길

끝에서는, 삭은 두엄 냄새 같은, 편안한

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

벗어 놓는단 말인가 부끄러운 나이 잊고

한밤을 여기서 늙어 머리 하얗게 세도록

바라본다 허망한 이승의 목숨 하나가

몸 반쯤 가린 바람 사이로 흔들리는 것을

 

        _ 나는 늙으려고. 조 창 환

수도원 가는 길 , 문학과 지성사

 

 

작년 가을 무렵 즈음 내 발로 걸어 들어갔던 허름한 철할관

사주 풀이 해주시던 할아버지의

"아주머니는 빨리 늙어야 겠어. 늙어야 편해지겠어" 라던

그 말씀이 시의 첫 문장에 자꾸만 오버랩 되는 건 왜인지...

사는 일에 자꾸만 지쳐가는

시든 내가 안쓰럽고, 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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